■ 재미있는 과학 이야기

폐플라스틱 페트(PET)병으로 진통제(타이레놀)를 만든다?

docall 2025. 10. 10. 21:00


폐플라스틱으로 타이레놀을?


파라세타몰(아세트아미노펜)의 화학적 원리와 새로운 합성법

제약산업은 화학의 거대한 응용 분야 중 하나다. 새로운 의약품을 개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미 존재하는 약을 더 빠르고 저렴하게 대량 생산하는 기술 역시 산업 경쟁력의 핵심이다.

최근 “폐플라스틱과 대장균으로 약을 만들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이 소식이 실제로 의미하는 바와, 화학적 배경을 살펴보자.

 

1. 파라세타몰 = 아세트아미노펜

전 세계적으로 널리 쓰이는 해열진통제 타이레놀(Tylenol)과 애드빌(Advil)의 주성분은 아세트아미노펜(Acetaminophen)이다.



‘파라세타몰(Paracetamol)’은 바로 이 화합물의 다른 이름이다.

정식 화학명은 N-아세틸-파라-아미노페놀로 ‘아세트아미노펜’은 영어식 명칭에서 따온 약칭이다.

‘파라세타몰’은 유럽식 명칭이다. 즉, 두 이름은 완전히 같은 물질을 가리킨다.

파라세타몰은 진통과 해열 효과를 갖지만, 작용 기전이 아직 완전히 규명되진 않았다. 다만, 중추신경계의 프로스타글란딘 합성을 억제해 통증과 발열을 낮추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고용량 복용 시 간에 독성을 일으킬 수 있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매년 500명 이상이 아세트아미노펜 과다복용으로 사망하며, 전 세계적으로는 간 이식의 두 번째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2. 기존 합성법 – 석유화학 기반의 단순한 구조

파라세타몰은 구조가 단순해 3단계 반응만으로도 합성 가능하다.

대표적인 산업 공정은 두 가지다.

▶ 고전적 합성법

- 출발물질 : 페놀(Phenol)

- 질산과 반응 → para-니트로페놀

- 수소화(Raney-Ni) → 4-아미노페놀

- 무수아세트산과 반응 → 파라세타몰 완성

▶ Hoechst-Celanese 공정

- 프리델–크라프트 아실화(Friedel–Crafts acylation)

- 옥심화(Oximation) → Beckmann 재배열

- 높은 수율과 선택성 확보

이처럼 기존 공정은 이미 효율적이며, 원가 기준으로 알약 한 정당 6~7원 수준이다. 그래서 새로운 합성법이 등장하더라도, 경제적 측면에서 경쟁하기는 쉽지 않다.


3. 새로운 접근 – 폐플라스틱에서 출발한 생합성

최근 화제가 된 연구는 PET(폴리에틸렌 테레프탈레이트), 즉 페트병 재활용과 연관되어 있다.
논문에서는 “폐플라스틱을 대장균으로 분해해 파라세타몰을 합성했다”고 소개되었지만, 실제 내용은 조금 다르다.

 



핵심은 플라스틱 자체가 아니라, PET를 산성 조건에서 해중합해 얻은 중간 물질을 대장균이 활용했다는 점이다.
즉, “플라스틱을 그냥 먹여서 약이 나왔다”는 식의 기사는 과장된 표현이다.

실제 목표는 파라세타몰이 아니라 PABA(p-aminobenzoic acid)였다.
PABA는 엽산 합성에 필수적인 분자로, 이를 미생물에서 성공적으로 만들어내는 과정 중 하나로 로센 재배열(Lossen rearrangement) 반응이 적용되었다.


4. 로센 재배열(Lossen rearrangement)의 의미

로센 재배열은 독일 화학자 빌헬름 로센(Wilhelm Lossen)이 발견한 반응으로 질소를 중심으로 한 아실기(RCO-)의 자리옮김 반응을 말한다.

이 반응은 아이소사이아네이트(-N=C=O) 작용기를 형성하며, 이후 가수분해 과정을 거쳐 아미드나 아민 계열 화합물을 만들어낸다. 즉, 파라세타몰 합성의 전단계 핵심 반응으로 이용될 수 있다.

연구팀은 이 로센 반응을 생체 조건에서 대장균을 통해 구현했다.
이는 화학 반응을 생물학적 시스템 안에서 재현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매우 의미 있는 결과다.

 

5. 결과와 한계

실험 결과, 대장균을 이용한 합성에서 최대 92%의 수율을 기록했다.
이 자체로는 높은 효율을 보여주지만, 실제 산업 공정으로 전환하기엔 몇 가지 한계가 있다.

- PET를 분해해 대장균이 사용할 기질을 만드는 과정이 별도로 필요함
- 반응 속도와 생산량이 기존 화학 공정보다 낮음
- 정제 과정이 복잡하고 생산 비용이 높음

즉, 이번 연구는 상업적 혁신이라기보다 “생화학적 반응을 실험실 수준에서 구현해낸 학술적 진보”라는 점에 의미가 있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파라세타몰과 아세트아미노펜은 같은 물질이다.
- 기존 화학 합성은 이미 효율적이며 저비용 구조를 갖고 있다.
- 대장균과 폐플라스틱을 이용한 새로운 합성법은 생체 내 로센 재배열 반응이 가능함을 증명한 실험적 성과다.
- 그러나 PET를 직접 분해해 약을 대량 생산하는 수준은 아니며, 실용화까지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이번 연구는 “폐기물의 생명공학적 활용 가능성”이라는 새로운 시도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하지만 타이레놀을 플라스틱으로 직접 만드는 시대가 오기까지는 아직 더 많은 기술적 발전이 필요하다.